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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johh 2019. 2. 25. 13:46

1화

니체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한 철학자. 백신이 없을 정도로 감염력이 뛰어난 지적인 병균.

니체왈 : 나는 너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병균일수도 있어. 위험한 사상을 내가 퍼뜨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수도 있어. 

유고>1884나는 마키아벨리보다 훨씬 더 나쁜 악한 책 한권을 쓸것. 

우상의황혼>>1888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이것이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사악한 시선"이자, 나의 "사악한 귀"이다. 여기서 한번 망치를 들고서 의문을 제기해 본다. << 기득권 기존의가치인 진리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겠다.

즐거운 학문1882: 내말을 믿어라.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요즘사람들 자유가 아닌 안전을 추구, 안전을 추구하는 곳은 지적발전도 이뤄지지 않는다.

>>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 진리를 알고 싶다면 계속된 질문을 하라.<<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하라고 가르쳐줌으로 인해 기득권세력에게 끊임없이 도전이되고 위험이됨.<< 젊은이의 영혼을 유혹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

니체>>너희들이 믿었던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가짜이고 우상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그리스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해서 고대그리스의 형이상학에 토대를 두고있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알고보니 인간이 살아나기 위해서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는것을 폭로.



위험하고 신비롭고 문제로 가득찬 우리들의 인생 탐구.


허무주의가 일상이 된 시대에 니체는 어떤 말을 던져 줄까?

>>


철학은 머리로 하는철학과 가슴으로 하는 철학으로 나눠져 있다.


머리로 하는 철학는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합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이런철학자들은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도 알 수 잇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데카르트, 헤겔.

가슴으로 하는 철학자는 직관과 감성에 호소, 기존의 가치관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던져.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봐야되, 플라톤, 마키아벨리, 홉스

다른한편으로는 삶이 사상이고 사상이 삶인 철학자들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나의 삶은 또 다른 하나의 사상이다.-니체

니체가 미치기 직전 토리노 길가에서 매를맞고 있는 마차끄는 말에게 동정을 보임.>> 니체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니체의 삶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들여다 봐야 니체를 이해할 수 있다.

1844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아버지는 예리한 정신력과 따뜻한 감성을 가진 완전 무결한 시골의 성직자였다-니체>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 왜 신을 부정했나. 

5살 되던 해 1849년 아버지가 36살의 나이로 돌아가심. 끔찍한 충격으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36살에 생명을 잃은것처럼 나도 36살 되던해에 정신적 생동감을 잃어버렸다.-니체 << 끊임없이 아버지를 찾음

동생마저 죽음.>> 어머니쪽 가족들에게 도움받기 위해 같이 이사감.

이모3분 여동생, 외할머니, 어머니. 여자6에 둘러쌓여 성장. 이것이 많은 영향을 준다.

내가 설파하는 사상은 영원회귀 사상인데 이 사상에 반대하는 두사람은 어머니와 나의 누이동생이다-니체 (안돌아왔으면 좋겠다)

1869년,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됨

1879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남(많은 저작을 남김)

10년동안 교수직을 하였으므로 연금을 받음.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남.

새로운 장소와의 실험을 하였다. 어느 장소가 나에게 맞는가. 어느 장소에 가면 글을 쓰고 사유를 할 수 있을까. 니체하우스>짜라투스라는 말했다. 주를레이바위>영원회귀사상의 영감을 받음

니체왈: 너가 산보하면서 사유하지 않은 사상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어라.

골방에서 턱을 괴며 하는 사상은 진정한 사상이 아니다.

불현듯 나를 찾아오는 사상만이 진정한 사상이다.

1889년, 토리노에서 광기의 발작을 일으킴

처절한 삶으로 사유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삶이 곧 사상이요. 사상이 곧 삶이다.

1888년 모든 집중력으로 6권의 책을 씀

1900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사망


죽음이 바로 눈 앞에 와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사유하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의 것일까. 우리가 논리적으로 일관성있게 만들어 가는 사상의 체계가 아니라 몸으로 부터 나오는 사상을 전개한 사람.


니체, 삶과 사상이 융합해서 하나로 나타난 사람

정말 훌륭한 철학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하나의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는사람

철학은 시대를 개념으로 포착하는 것이다.-헤겔

프리드리히 니체가 온몸으로 19세기를 표현한 철학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은 내 책을 의심의 학파.

나아가서는 경멸의 학파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용기의 학파,

즉 대담함을 가르치는 학파라고 불렀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악마의 적절한 변호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말해서 신의 적이자

신을 소환하는 자로서 이렇게 깊은

의심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실제로 나 스스로도 빋지 않는다.


19세기에 만연했던 분위기, 의심


의심의 학파, 마르크스(생산관계), 니체(권력의지), 프로이트(무의식)

서양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었는데 마르크스는 정신세계는 물질세계의 반영에 불과하다라고 말함.-유물론

우리는 모든것을 의식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이드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말함.

19세기의 시작은 1832년부터라고 한다. 1831년 헤겔이 죽음.(헤겔이 각종 철학사상을 완벽하게 정립해놨기때문에 사상가들이 혼돈에 빠짐) 1832년 괴테 죽음

청년헤겔파(헤겔의 정신을 인간주의적으로 재평가하여 정치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 이들,  대표되는 인물로 마르크스, 포이어바흐가 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 직접적으로 무엇인가, 삶을 어떻게 실철할 수 있을 것인가=실천학파

마르크스=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번혁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 자신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 충동들 본능들이 움직이고 있다.<<< 삶의 의지, 나는 그곳에서 항상 권력의 의지를 발견하였다-니체

나는 내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내 이름에 어떤 엄청난 것에 대한 회상이 접목될 것이다.

지상에서의 전대미문의 위기에 대한,

양심의 비할 바 없이 깊은 충동에 대한, 지금까지 믿어져왔고 요구되었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결단에 관한 회상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새로운 가치와 관점, 세계관을 정립하고자 치열하게 몸부림 쳤던 니체를 보여준다.

허무주의가 일상화된 시대, 다시 한 번 질문하라!!


사상으로 접근을 하면 철학은 어렵다. 문제로부터 출발하는것이 좋다. 어떤문제? 나에게 가장 절실한(실존적) 질문은 무엇인가? 

서양철학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질문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질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서양철학은 사상체계가 거대하다. 그러므로 헤겔을 읽지말고, 헤겔의 특정한 문장을 곱씹어보아라.


위험하게 살아라=너의 삶을 실험적으로 살아라.

고정된 틀(가치)을 깨고 삶을 도전으로 받아들여라.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적 가치관을 탈피하고 너만의, 다른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드는 도전적인 삶


2화


니체가 던진 '불편한 명제'> 신은 죽었다.1882-83


신의 죽음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것인가.


1887유고> 내가 얘기하는 것은 다음 두 세기의 역사이다. << 그 세기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느끼거나 이해X


허무주의 : 21세기 현대인의 문제 << 다음 두세기 : 신의 죽음이 모든사람들에게 당연시 느껴지는 세상.


허무주의의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니체전집 1887>> 허무주의가 문 앞에서 서있다. 모든 손님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 손님은 어디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인가?


허무주의 우리가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실존적 물음.


오늘날은 상식이 되어버린 신의죽음.


신의 죽음은 본래 기독교 이후의 사건이지 결코 반기독교적 사건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이 죽은 기독교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세속화가 그 어떤 신학적 답론에서도 하나의 규범이 되어버렸다.


>> 세속화 : 현대 시대의 상징


신의죽음을 이해하려면 이시대가 세속화임을 이해 : 종교적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점점 더 세속적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되는 것.


누구나 세속적 가치가 중심을 잡고있다.


세속화 시대, 우리는 무엇에 열광하는가?


전통 :  생산> 소비, 21세기 : 생산<소비


"소비는 의미의 체계이다."<< 현대인들은 생산보다 소비에 큰의미를 둔다.


오늘날 숭고함 고상함= 스펙타클 : 가치보다는 이미지에 더욱 열광하는 현대인.


기존의 서양 철학 < 진정한 자아를 찾는데 몰두했다.'너자신을 알라'


현대사회 특징< 자아는 내가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 니체적 생각.: 자아탐구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자아를 망각해버리고 너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 집중하면, 너도 모르게 너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내고 발견할 것이다. >> 자아탐구가 아닌 자기창조의 시대


막스베버>> 역사가 지속될수록 세속화가 진행될 것이다. WHY? 세상에는 더 이상 비밀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 예정된 신의 죽음 : 자연과학의 발전 >> 더이상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지(기능적측면)>> 찰스 다윈 : 지구에 사는 수많은 종은 공동조상들로 부터의 거듭된 분화의 결과물이다.-찰스다윈 (창조x진화의과정, 어떤상황이되면 자연은 누가 살것인지 선택) << 프리드리히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보편화된 인식을 하나의 명제로 말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어디있느냐.< 최고의 가치였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허무주의에 빠져. 21세기 현대인들의 문제.


신은 왜 죽었을까?>> 누가 신을 죽였는가. 자살(전전능하므로 명제적모순)or타살(o)


새로운 시대의 토대는 신 자체가 죽었다는 감정이다-헤겔<<헤겔도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니체가 미친사람의 입을빌려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시장: 상품이 거래되는 세속화의 장소)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신은 죽었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즐거운학문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런일을 저질렀는가.


이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우리가 신을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가 설정한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신을 죽이게 된 것이다.


신의 3가지 비유.>>대양, 지평선, 태양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즐거운학문


태양: 생명의 근원, 생명의 전제조건인 태양은 최고의 신이 되다.

지평선: 사물이 사물로서 보이게 하는 조건. ex)새로운 사상으로 지평을 넓혀줬다. 지평이 안보이는 동물: 우물 안 개구리

대양: 영원과 무한의 상징

이런것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우리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짐.<< 허무주의에 빠짐

신이 죽었다.: 모든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들로 인식하게 해주었던 형이상학적 근거가 이제는 더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의 빈자리는 허무주의를 가져온다.

가치가 전도되어버림.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 것인가?


허무주의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


허무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뉜다.

수동적 허무주의: 왜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는 상태, 어떠한 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상태. 이것에 대해 태처를 못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임. =무능력의 표현, 약함의 징후로서 정신력이 지칠대로 지쳐버리고 고갈되어 버릴 수 있다. 인생에 목표x


과거에는 연로한 사람들의 특징이었지만, 현대에는 20대 학생들도 그런다.

두뇌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태도가 중요.

능동적 허무주의로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


부모가 시키는대로 하면 절대 자유인이 되지 못한다. 거역할 줄 알아라. 

Nothing is true: 최고의 가치가 없다>> 능동적해석: 내가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다.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


인간은 의미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이유가 있다. 딱 1가지.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줄 안다. 의미 없는 존재에 의미부여가 바로 너의 삶이다. 네 삶에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


형이상학은 항상 진리를 탐구하는데, 그 진리라는 것이 실질 적으로는 누구나 검증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에 불구하다.-니체

ex) 천동설>>지동설, 뉴튼의 물리학>> 아인슈타인 (페러다임의변화)

진리 탐구의 끝은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해석 하는 것.

니체: 진리보다 진실성을 훨씬 높게 평가하였다, 위험을 보고 도피하지 않고 직시 할 수 있는 능력, 신은 죽었다 이런 말을 들어도 도망치지 않는다. 

극단적인 입장은 완화된 입장으로 대처 될 수 있는것이 아니다.

다시금 극단적이지만 반되적 입장들로 대처 된다.

>> 극단적이 되어라.radiclal해져라.(뿌리라는 뜻: 어떤 문제든 뿌리까지 파고 들어 끝까지 사유하라)

내가 왜 사는지, 삶의 의미가 뭔지 믿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발생하는 것이다.

신은 하나의 해석, 세계를 바라보는 해석이다.


하나의 해석이 몰락한다.

우리 이 사상을 가장 두려운 형식으로

사유해보자. 의미와 목표도 없는,

허무에 이르는 피날레도 없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존:"영원회귀"

그것은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이다

:무(무의미한 것)여 영원하라 - 니체전집


내 삶이 독특한것 처럼 보이지만, 특별할 것 없고, 끊임없이 차별화 되려고 하지만, 원거리에서 보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무여 영원하라>>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실존의 의미, 새로운 유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신의 죽음, 의미도 목적도 없는 삶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살신성인:자신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한다.

전통형이상학: 니 몸을 극복하면 신이 될 수 있다.

니체: 우리가 몸의 존재인데, 우리가 몸으로 살다 몸이 죽으면 대지로 돌아간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죽어본적이 없으므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몸으로 존재한다.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것은 정신이 아닌 몸이다. 정신은 몸을 왜곡 시킨다. 너무 정신적인 가치에 몰두하지 말아라. 미친다. 너가 이제까지 맹목적으로 추구하였던 절대적 가치가 더이상 가치있다고 인식하지 않는다면, 신을 죽이면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새로운 바다에 물이차고, 태양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성인이 될 것이다. 내가 바로 인격이 되고 내가 바로 너의 자아를 찾게 될 것이다.(신의 죽음으로부터 자아를 찾는 일을 시작하라.)

몇 백년 몇천년간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행동이다.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예술가. 신은 죽었다: 네가 네 자신의 삶에 예술가가 되어라. 절대적 가치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아도 좋다. 너의 몸을 인정하고, 너의 충동과 본능과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너는 바로 본래의 네가 될 것이다.-니체

중심을 잡는다=자신만의 가치를 갖는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이 말 자체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가정하자.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데, 여자는 어떤 계기로인해서 남자를 받아들이지도 이해도 못하겠다. 니가 나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고, 너가 내 앞에 있지만, 내 가슴 속에서 너는 죽었어. 상징적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야지 물리적으로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다.

죽으려면 살았어야하지 않나. 신자 집안이었기때문에, 니체는 신의 가능성을 믿었다.<<이부분 사유 그만하기



3화

우리가 추구해왔던 절대적 가치가 더이상 의미가 없다는것을 알게 될때.>> 우리는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된다.> 니체: 삶을 돌아보면, 모든것에는 의지가 있다.>> 신이 죽은 시대 권력에의 의지를 사유하라<<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라.


형이상학적 가치보다 권력의 의지를 사유하라고 하는 것일까? 

내 말을 들어라. 

더 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성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뿌리를 붙잡고 늘어지면 내 말을 이해할것이다.) 살아있는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우리의 의지는 권력을 향해 있다.-니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누어진다.>> 약자의 입장에서 권력은 불편한것이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권력은 약하다 말하며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순>> 마키아벨리- 권력=세계를 움직이는 실질적 진리.>> 신의 권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발전하였다. 권력의 외면적 요소:힘의작용(힘, 에너지, 세력)< 권력의 내면적 요소:의지와충동(욕망, 충동, 생존)삶에의의지=권력에의 의지.<< 생명의 의지? 나는 그곳에서 항상 권력의의지를 발견하려했다.-니체 <<권력은 생명의 근본적인 현상일 뿐이다. 발현되는 과정에서 나쁘고 좋을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나쁜것이 아니다.


약자도 권력을 추구한다. 

니체는 도덕을 두가지로 나눴다.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주인도덕: 명령하는 자의 가치창조(행동,active)

노예도덕: 복종하는 자의 가치창조(반동,reactive)


주인도덕은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강자의 가치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즉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복수이다.- 즐거운 학문

생존을 위해 인권 개념을 만든 민중들.

원한은 반동적 힘들이 승리한 것이다.-질들레즈

무능력의 계략이 있다-니체

무능의 간계: 무력한 사람들이 자기자신들의 약한 처지와 무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가치를 거꾸로 우월한 가치로 포장하고 위장함으로써 살아남고자 하는 계략

-무력감에서 생긴 복수심- 약자의 가치를 보편화 시켜 무기로 삼는 무능력의 간계

-억압당한 자, 무능력한 자의 가치전도

-"우리는 약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자"

>>즉, 권력은 강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 세상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눠있지만, 피지배자가 늘 지배를 받고 복종하는자가 늘 복종을 강요받는것은 아니다. 주인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에 의존한다. 하인이 없다면 주인은 아무것도 못해. 하인은 주인이 자기자신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무기로 삼는다. 이것이 상호의존적인 권력의 속성이다.


이 세상이 권력으로 충만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권력을 극대화하고 증대시키고자 하는 기본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권력은 악한 것이 아니다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새로운것을 창조하고자 하느냐, 권력을 가져라. 자유롭기를 원하느냐,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을 가져라. 본능과 충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느냐, 그러면 권력을 통제할 힘을 가져라.

모든 물질적인 것은

미지의 사건에 대한 일종의 운동 징후다.

운동들은 징후들이다.

그리고 근본욕구는 권력에의 의지다.

>>우리 내면에는 끊임없는 권력의 의지가 작동하고있고, 바깥으로 판단하고 있는것은 단순한 내면의 운동의 징후에 불과하다.


권력에의 의지의 운동구조

1.권력정도확인

2.권력감정: 내 의지를 저항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킬 수 있을때 뿌듯함을 느낀다.

3.권력증대: 지금의 삶을 넘어서고자 한다.

인간은 이 과정을 끊임없이 계속한다. 권력이 커지기를 꿈꾸는 인간의 삶.

권력은 스스로를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자기극복). 생명의 근본 현상(내것으로 만들어야해).

권력의 어원, dynamis>> 현재 영어 dynamic , Energy

무엇인가를 이뤄나게 하는 힘.


권력이란?

1.권력이란 저항이 있어야 실현된다.(내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것은 저항을 통해 깨닫는다.)

2.권력은 다양한 세력의 관계이다.(둘 이상의 관계에서 권력이 형성된다.)

3. 권력은 통일적인 질서이다.(통일적인 힘을 밑받침 하는 것은 가치이다)

4. 권력은 항상 새롭게 해석, 생성된다.(권력을 가지고 있는자가 늘 가지고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를 끊임없이 해석해야한다. 사랑도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지속될 수 있다.)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자유를 추구하는자: 권력관계에서 최약자

권력이 비슷한 사람들 가운데는 정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권력이 흘러넘쳐서 상대방이 아무리 저항하고 복종하려하지 않으려 해도 그것을 관용하고 허용할 수 있을정도의 넉넉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권력자.

진정한 권력자=사랑을 할줄 아는 사람.(active한 사랑, 종교사랑은 수동적 맹목적사랑)

우월한 사람은 질투를 받지 않는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 나는 무욕망을 욕망한다.


내면을 살펴봐라 그러면 그 자체가 권력의 의지다. 그것을 직시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권력의지의 충돌로 인한 갈등을 두려워 말라.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중요하다.



4화

만약 신이 죽었다면, 이제까지 신을 향했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인가.

네가 이제까지 천상의 가치를 추구하였다면 이제 그 시선을 너 자신에게 돌려라.-니체

>> 위를 바라보았던 시선이 지상을 내려다보게 됨. 몸속에 꿈틀대는 몸속에 권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내용

그러면 우리는 권력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권력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는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 자신을 뛰어넘어,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초인 사상의 핵심적인 문제 : 자기극복

두가지 인간 유형 : 초인, 마지막 인간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인간유형을 보여주겠다.

그것이 다름 아닌 초인이다.

그런데 너희들의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은 최후의 인간과 같다.

군중의 고함과 환호가 그의 말을 막았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최후의 인간을 달라.

우리들로 하여금 그 최후의 인간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가 그대에게 위버멘쉬를 선사하겠다."

그들은 이렇게 환호하고 혀를 차댔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하려 하는가?

초인의 실존양식, 삶의양식은 무엇인가? 이렇게 하기 위해선 어떤 자기극복을 해야 하나? 

21세기에 인간의 자화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관점에 의하면 마지막 인간이라고 한다.

물리적 생리적으로 지구상 마지막 인간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실존 양식으로 볼때 올때까지 온것같다는 의미.


세계금융위기 경제가 파국, CEO들은 더 많은 연봉&보너스잔치.

사람들이 생각했다."자본주의가 이렇게까지 가야하는가?"

그당시 외국의 언론들을 보면, 자기 사리사욕만 취하고 이기적이기만 하고, 공동의가치 공유의가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메뚜기떼와 같다고 말했다.

니체는 그런이들을 독파리에 비유했다.


고독이 그치는 곳, 그곳에서 시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장이 시작되는 곳.

그곳에서 위대한 배우들의 소음과

독파리 떼의 윙윙거림이 시작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개인이 중요하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는 태도가 메두기의 삶의 양식이고, 이것이 최후의 삶이다.


허무주의 시대의 삶은 초인이거나 아니면 마지막인간이거나.


천상의 가치가 붕괴되었을때 우리는 지상으로 내려올수밖에 없고, 이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러기위해서 우리가 이 대지의 모습, 우리가 추구하는 세속적인 가치들을 돌이켜보고 성찰하고 반성하게되면 두가지 삶의 양식에 도달한다.


초인과 마지막인간은 무엇으로 구별되나: 

너희들은 여전히 사랑을 중시하는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타령을 하면 할수록 사랑을 모르는 사람, 

이 세계를 지배해왔던 낡은 가치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하는가?

우리는 창조에 관심이 없다.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것에 관심이 있다. 

너희들은 무엇을 동경하는가?

현대인은 가슴에 아무런 별도 품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별을 잉태할 수도 없다.-니체

꿈을 동경하기보다는 눈앞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초인이 추구하는 가치인 사랑과 창조와 동경과 별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무엇인가를 목표를 위해 활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자. 목표보다 높은곳을 향해 활을 겨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목표위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극복의 의지를 잃어버린 마지막인간이다.

 마지막인간은 작은 행복에 안주하는인간. 교육, 행복, 일, 건강을 원하는 사람들. 지상의 세속적가치를 추구, 현재상태에 만족.


이렇게 살고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인간유형을 제시한다.

현대인들이여 초인이 되어라. 마지막인간은 스스로를 파멸시킬수 있는 마음의 양식이다.

초인은 독일어로 위버멘쉬이다.

우리가 초대 인간을 보는듯이, 20만년 후의 인간이 우리를 보면 우리보고 원숭이라고 하지 않을까?

니체의 초인은 미래의 진화된 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또 하나의 해석의 가능성: 초인에 대한 기술적 해석:

트랜스휴머니즘: 과학과 기술로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개선하려는 사회적 운동.

니체가 이것을 꿈꾸진 않았을 것이다.

초인에 대한 이상주의적 해석: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인, 선한 자, 그리스도 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이 사람을 보라.


초인의 형식적 이해. 1.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한 사람(이제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천상의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늘 가까이 접하고 만나게 되는 일상적 가치를 폄훼했던 태도와는 정 반대되는 입장의 실존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2.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다"

Creating something beyond oneself.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자면, 그 사람이 설령 물리적으로 힘이 없어도, 대단한 능력이 없어도, 사이보그처럼 영원히 살수없을지 몰라도 초인일 것이다.


내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서양의 기독교적인, 형이상학적인 가치관이 지배하였던 시대는 항상 인간의 시선이 자기자신을 향하기보다는, 자기자신과는 먼 신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새로운 가치 창조가 가능하다.

내 자신을 넘어 설 수 있는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하라.

삶을 지탱하고 있는 핵심적 가치는 무었이었는가????


초인.

존재의 의미=대지의 의미(살아가고 있는 지상) ,나와 다른 존재의 의미를 깨달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의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삶에는 두가지 살아가는 양식- 초인, 마지막인간


초인: 실존의 양식이 있다.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즐거운학문

정말 직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려면, 이 길로 가야해! 이런것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가치를 갖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엄청 힘들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간다. 이런 행복은 무엇을 획득했을때 얻는것이 아니다. ex)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을때 행복을 얻는것이 아니라. 그 여자와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과정이 행복이다.

이런 관점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창조를 강조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그 무엇.

새로운 관점에서 창조를 하려고 한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존에 관점에서 일탈하는것이 필요. 창조와 광기는 조금 연관되어있다. 무엇인가 새로운 페러다임을 제시하고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사람은 조금 미쳐있다. 창조적이 되려면 조금 미쳐있어야 한다. 미치지 않고서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마지막인간: 살아가는 능력x, 새로운창조x. 남들의 가치를 쫓는다. 유행에 민감, 그저 행복한 상태에 만족(데카당스적 인간)


사람은 짐승과 초인 사이를 잇는 밧줄.

하나의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넘어가는 과정'이요

'내려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넘어가는과정(overgoing)새로운 가치창조의 단계

>>자기가 디디고 있는 대지의 속성을 정확히 알아야 안다

>>현실을 확인하고 아는것 내려가는 과정(down-going)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창조하는자.

1.스스로 목표를 제시하는 창조하는 자.<<목표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 삶의 희열을 느낀다. 살아가는것 자체에,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것은 우리가 스스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 저사람과 함께가면 내 앞길이 환해지겠네 하는 느낌을 받게 해주어야 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평소에 가던 익숙한 길에서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돌뿌리 하나도 나무 한그루도 새롭게 느껴진다. 이것이 니체가 원하는것이다. 내가 바뀌는것! 그러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신이 있던 시대에 신을 믿었던 시대에는 감히 실현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던 초월적 가치를 추구했다. 그러면 현대에는 초월적 가치가 필요없는 것일까? no, 니체는 재해석했다. 신이 없는 시대의 초월적 가치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것이다. 신이 없는 시대에도 신성함은 있을 수 있다. 종교심도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유신론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상관없다. 자기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고 신성한 사람이고 건강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자기가 이뤄놓은 상태를 넘어서고자하는 태도, 이 태도를 체화한 인간유형의 실존양식이 초인이다.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가치를 창조하라.-아모르 문디

2.대지에 의미부여

3.미래를 약속하는 자

4.어느것이 선이고 악인지를 결정


그렇게 내려가는 자들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들이야말로 저편으로 넘어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갖고 있는 자를.

그런자에게 머리는 심장에 있는 내장에 불과하다.(머리보다 심장을 중요시 생각)

그러나 심장은 그를 내려가는 몰락으로 내몬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좋은데 그사람하고 살면 행복할까?라는 생각x


심장의 목소리를 들어라.


Q:사회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가치선택이 가능한가?

장자크 루소: 자유라 하는 것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내가 과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나를 구속하는것이 너무 많아. 이럴때 일수록 머리보다는 가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하고 있는것이 뭐야, 이룩해 온것이 뭐야, 그것이 너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어? 이렇게 질문하는 과정에서 자기 극복의 자유가 있다.


Q:가치가 상충했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우리가 모든 생명체를 만나면, 명령하는자와 순종하는자가 있는데. 명령하는자가 순종하는자보다 훨씬 힘들다. 명령하는자는 창조해야 하기때문에 더 어렵다. 가치가 상충하는 경우 타협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없다. 정체성을 갖고 개인의 개성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과정을 갖는것과 마찬가지로 가치도 충돌할때마다 가치의 위계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가치가 실제로 충돌하는것처럼 보이지만 선호도의 문제이다. 



5화

어떻게 살것인가x 삶을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o<<니체의표현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니체


도대체 이 삶을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


당신은 왜 사십니까??

대답을 하지 못하면 삶에는 목적이 없다. 이것은 허무주의의 비극에 빠져 있는것이다. 하지만 삶에는 희비극이 엇갈린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목적을 강요하고 목적을 압박한다. 살려면 목적이 있어야 한다.(희극) 목적이 없다<->스스로 목적을 만들어내라.

니체가 허무주의 사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영원히 반복되는 이 비극을 극단적으로 사유해보자!


이 사상을 가장 두려운 형식으로 사유해보자.

의미와 목표도 없는, 그렇지만 피할 수 없이 회귀하는,

무에 향하는 피날레도 없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존:"영원회귀"

그것은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이다:

무(무의미한것)여 영원하라!거 무수히 반복되었던 삶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영원회귀, 삶을 긍정 하라.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우리는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만, 니체는 그것이야 말로 삶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삶을 벗어나고 싶어 일탈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무(무의미한것)여 영원하라!(<내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것이야, 아무런 목적도 없어, 의미도 없어, '그러면 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께'이런 자세대로 우리가 살아갈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우리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니체의 사상이다. 영원회귀, 삶을 긍정하라.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세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전통형이상학: 존재=진리, 변화=가상

기존의 세계관은 진리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학적으로는 신은 자기의 형상대로 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존재자체가 진리라고 하였다.

니체: 존재=가상, 변화=진리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이 반복한다. 계절의 반복처럼. 

너는 똑같은 강물을 두번 건널 수 없다.-헤라클레이토스의 전통을 따름(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만물은 계속하여 전환, 생성되므로 변화야말로 세계의 진리라고 주장)

니체의 세계관: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화자체가 사실은 진리이고, 너가 이 변화하는 세상에 주춧돌, 너가 의지하고싶은 대들보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허구이다.

주를레이의 바위에서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인데, 그것은 나쁜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온몸으로 끌어 안아야 할 긍정적인 것이야.'하고 떠올랐다고 한다. 우리가 늘 알고 있던 사실도 어느순간 각성을 하고 통찰을 하는순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니체왈: 영원회귀는 모든 사상 중의 사상,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최대의 중량,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도 가장 심오하고 신비한 사상이다.


내 삶에서 영원히 반복 되는 것은 무엇인가? 많다..

죄가 없는 자. 실험으로서의 개개인.(우리 모두는 어떠한 죄도 없다. 너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무죄다)

삶을 가볍게하기, 스스로낮추기, 약해지기-넘어가는과정

새로운중량:동일한것의 영원회귀


개인의 실존은 무엇을 의미: 너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주인이 되어 실험적으로 살아라. 너가 태어난 순간 네 삶을 실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태어났다. 

죽음의 순간.. 정말 좋았어, 당신과 함께해서 더 좋았어.

우리의 삶이 고통과 고뇌로 무거운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가벼워진다. 스스로 낮추고 스스로 약해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음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것을 정당화 하는것이 영원회귀이다.

내가 이런 사상중에 사상 영원히 반복적으로 회귀한다는 사상을 온몸으로 인식하고 체현한다면 그 사상은 너를 변화시킬것이다.

신이 죽었을때 우리가 추구하는 소인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어야 한다.


과연 영원히 반복되는 삶은 구속일까요? 구원일까요?

프리드리히니체는 삶을 영원히 무엇인가가 만들어지는 생성과정으로 보았다.

목표는 따로 없다. 80-90세까지 살고 난 후에 내 목표는 다 이뤘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삶 자체가 목표인사람은 있을것이다.

목표 없는 끊임없는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인정하고 정당화 할것인가?

고대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삶과 실존을 어떻게 보았느냐? 끊임없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 이 시간에 여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우연적인 사건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명령이 주어진 것일까? 우연히 태어난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라!! 우리 존재자체는 주사위와 같다.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끝날 것이다.(인간의 삶은 주사위나 모래시계같은 실존을 살고있다.)

내가 생겨나도록 만든 모든 조건들이

세계의 슬픔 속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나의 삶은

그 사이의 위대한 순간에 시간이 될 것이다.-유고


짜라투라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중 난쟁이에 대한 일화.


어느 성곽이 있다. 성곽의 바깥으로 달려나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영원으로 인도되고, 뒤로 난 길도 영원으로 인도된다.(이 성곽의 이름은? 현재 이 순간)

"이 길을 보라! 난쟁이여"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은 성문을 기점으로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이곳에서 만난다.

그 길들을 끝까지 가본 사람이 아직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미래로 부터 이어진 영혼과 과거를 향한 영혼, 과거로부터 이어진 영혼과 미래를 향한 영혼이 만나는 곳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일, 5년 후, 죽을때쯤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세속적인가치,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를 너무 절대화 하다 보면 너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놓쳐버린다. 순간을 놓친다는것은 영원을 놓치는 것이다.


이들 두 길은 서로 모순이 된다.(이 두개의 길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 모순이 만나는 곳에 우리의 삶의 의미가 있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실존의 길을 긍정할 수 있는것일까?

미래는 더 좋아질거야. 이런말을 하면 할 수록 우리는 순간을 놓치게 된다. 정치 사회 철학적으로도 미래를 너무 강조하는 사람은 믿음직하지 않다. 미래에는 잘해줄게x, 지금 잘해보자o

영원회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잇는것: 이 순간을 포착하라!!


이 순간에 관련된 영원회귀 사상으로부터 이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 아주 날카로운 통찰이 있다는 것을 정말 제대로 인식하고 통찰한 여성 :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살로메만큼 니체의 사상의 핵심을 꿰뚫은 사람은 없다.

그 핵심사상은: 영원회귀 사상

회귀로부터 해방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회귀로 돌아가는것을 말한다.

동양에서는 윤회(생명이 있는 것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사상)는 나쁜것. 윤회를 넘어서 열반(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완성된 깨달음의 세계로 세상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에 드는것을 추구한다.

우리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삶의 회귀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우연히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창조되고 생성되는 과정이라는 사실. 이러한 것들은 결과적으로는 순간순간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필연보다는 우연을, 존재보다는 생성을, 미래보다는 순간!!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냐!: 순간에 충실하라. carpe diem


인간의 실존은 결과적으로 실존해야할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의미를 부여한다.


삶은 고통이다.

죽은은 삶에 대립되지 않는다.

"삶은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


우리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매일매일 극복해야 한다. 하나를 극복하면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니체왈: 이 세상을 보라. 너희가 죽어야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고 새싹을 뿌려야 다음 봄이 되면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우리가 불로장생을 꿈꾼다면 그 결과적인 삶은 끔찍할 것이다. 죽음과 삶은 모순적인 대립관계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너가 순간에 충실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서 지금지금의 삶을 건너뛴다면, 그것이 오히려 죽음일 수 있다.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 삶의 한 가운데는 죽음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최대의 중량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 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즐거운 학문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다른 삶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큰 차이가 없다. 내가 다른 삶을 꿈꿀수도 있다. 고통, 고민, 갈등, 충돌이 없는 오직 평화만이 존재하는 삶을 꿈꿀수도 있다. 그렇지만 막상 살면 고통이 있고 갈등이 있고 전쟁이 펼쳐진다. 우리가 극복하고 부정하고 싶은것들 조차 우리가 살아야하는 삶속에 필연적으로 속해있다. 갈등이 싫다고 갈등을 제거해버리면 또다른 갈등이 생겨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삶은 반복된다면 프리드리히 니체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가 영원회귀 사상을 너무 신학적 철학적으로 정당화 하려고 할 필요없다. 우리들이 몸으로서 일상속에서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것인가가 중요하다. 


너가 어떤 삶을 꿈꾸던


너는 이것이 다시 한번

그리고 수 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는가?-즐거운학문


우리들이 죽음을 맞이할 상태에 놓여있다고 가정해보자.

지난 인생을 반복되기를 원하는가? 하고 질문을 던졌을때, 예!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나의 삶을 잘 산것이다.

아니오! 나는 이 삶을 살고싶지 않아요. 라고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우리삶을 책임있게 못 살아온 것이다.


아니오!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면, 니체가 망치를 가지고 들고나와 망상과 착각을 깨버릴것이다. 네가 설령 다른 삶을 원한다고 해도, 너가 다시 환생해서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고 해도 너의 삶 속에는 고통과 번민, 갈등, 충돌과 전쟁이 다시 개입할 것이다. 우리 삶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다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니가 니 몸으로 이 진리를 얼마만큼 실현할 수 있을까, 얼마만큼 견뎌낼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다. 이 생각을 몸으로서 체현해야 한다. 머리로서 체현하는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너는 너 자신의 존재자체와 실존을 긍정하게 되고, 그 긍정하는 순간 너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너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바라보았던 그 세계가 다시 긍정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풍부한 풍요로운 세계로 변화하게 될것이다. 이것이 영원회귀 사상의 핵심포인트. 생각의체현> 자기긍정> 변신


생각해보자! 내 삶이 또다시 반복되는데, 그 삶속에는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기쁨이 관여되어 있다면, 과연 나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그토록 꿈꿔왔고 내 삶이 실현될것이라고 믿었던 미래의 내 존재를 돌이켜보는데, 그 미래에서도 내 삶이 커다랗게 변화하지 않을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순간의 긍정은 결과적으로는 내가 살고있는 삶을 긍정하는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수밖에 없다는 유한성과 사멸성을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20대에 죽음을 긍정한다면 삶을 더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삶을 긍정하고, 순간을 긍정하고, 죽음을 긍정하라.그래서


다시 생겨날 수 있기 위해서는

소멸하기를 원해야 한다.

한 날에서 다른 날로, 백 개의 영혼을 통한 변모.

-그것이 너의 삶, 너의 운명이 되도록 하라.-유고


끊임없이 지속되거나 영속되기를 원하지 말아라. 끊임없는 변화이 변화하도록 노력해라. 그것이 순간을 즐기는 태도이고, 순간을 향유하는 적극적인 자세이다.


그렇다면 그런 과정속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이점이 있다. 형이상학을 믿어야만 신을 믿어야만 영혼을 신뢰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영혼을 믿든 안믿든 간에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영원히 회귀된다는 이런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주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고 순간을 긍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말했다. 왜, 영혼은 고대 그리스어로 '스스로 움직이는것'으로 표현되어있다. 다른 외부적인 힘에의해서 움직이는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스스로 움직일때, 여러분들은 여러분 삶의 주체가 된다. 내 삶을 내일로 연기하고, 미래로 지연시키는것이 아니라, 이 순간을 긍정하고 열심히 살아갈 때, 우리들은 능동적으로 살아간다. 영혼이 있는 삶이 된다.


나의 사상이 가르치는 것.

다시 살고자 원할 수 잇도록

그렇게 살아라. 그것이 과제이다.-유고


이 삶을 살아가면서 나 이런 삶을 다시 살아가고 싶어 이런 마음과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이 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들이 헤메던 삶의 목표와 의미는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Q: 초인의 삶, 어떻게 가능한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가? 우리가 다른사람의 도움없이 스스로 판단하는것이 스스로 움직이는것이다.


사람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늘력을 가지는 것이다.-칸트


항상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이제까지 권위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했던 생각과 이념과 사상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회의를 한다는것은 끊임없는 파괴이다. 부정적측면은 능동적측명을 함축하고 있기때문에 이것을 통해 새로운것이 만들어진다. 그런의미에서 초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혁신과 파괴가 필요하다. 이것을 통해서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용기를 갖게 된다. 

영혼 : 스스로 움직인다. 스스로 움직인다를 우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매일매일  돌아가는 일들이 자신의 의지와 행위와 이런것들이 개입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니체나 그리스 사상가들이나 아주 경계했던 태도이다. 그러니깐 스스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가 개입할 여지없이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일상의 매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Q: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가?

니체가 직접적으로 동양사상, 불교, 흰두교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거리를 걷다 우연히 발견하게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철학적 깨달음을 많이 받았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니체가 책을 많이 읽었기때문에 그당시  일반 유럽 지성인, 사상가들이 동양에대해 알고있는정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것이 좋을것같다.


니체가 10년간 바젤대학교 고전문헌학교수로 제직했을때 세속적의미에서 가장행복했었을때라고 한다. 세속적인것을 폄훼했던 사람은 아닐것이다. 하루에 냉철하게 생각할수 있는 시간을 얼마 안된다. 끊임없는 끔찍한 고통때문에 몸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발전시키게 된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사유했던 사람이 니체이다.  


6화

모든 생명체는 권력의 의지이다. 모든 생명체가 권력의 의지임을 인정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왔던것, 경험해왔던 모든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종류의 삶의 양식을 실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허무주의가 일상화되고 평범한 시대에 어떻게 하면 정말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세 가지 변신" 너 자신이 되어라.


우리가 철학을 하게되면 여러가지 인식을 하게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진단할수도 있다. 인식이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삶의 새로운 종류의 양식을 우리가 추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이 된다.

"인식이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인식이다"

철학을 통해 어떻게 거듭날수 있는가?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본래의 자아를 획득하고 형성해가는 과정을 세가지 비유를 통해서 서술하고 있다.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스스로 자문하라. 


낙타, 사자, 어린아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순서를 거쳐야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양치기나 사람이 아닌,

변신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어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그와 같이 웃어본 자는 없었다.(모든 인식의 과정을 거쳐서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변신의 단계를 거쳐간 사람은 이 세상 그 자체를 있는 그자체로 인정할 수 있고 긍정할 수 있기 때문에 웃을수 있는자라고 말한다.)

웃음에 대한 동경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아,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을 견뎌낼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지금 죽어야 한다는 것을 견뎌낼 수 있는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낙타의 단계: 복종할 줄 알아야 한다.

낙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중력의 정신,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무거운 짐(개인에게 부과된 삶의 과제 들)을 지는 정신, 복종하는 정신

낙타는 짐을 지는 정신이다.-니체

낙타는 what is heavy 나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


가장 무거운 것을 견뎌내는것


무엇이 가장 무거운 것인가?

내가 그것을 짊어지고 나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기뻐할 것이다.


스스로를 시험하는 자를 시험하기 위해 

높은 산을 오르는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임무를 잘 수행하고 난 다음 자신의 권력의지를 충족했다고 생각하고 기쁨을 느낀다.

무거운 짐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자신을 찾아가고, 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내게 실현하기 어려운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진리, 도덕, 관습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수 있다. 제도와 관습들 나를 구속하는것들을 총제적으로 수렴되어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면, 이것은 신으로 표현된다.

신을 의지하는 삶은 가장 무거운 삶이다.

종교적, 도덕적인 명령들은 개인의 변화를 막는 무거운 짐.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뎌내는가?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일지라도 뛰어드는가?-니체


관습과 규범을 견뎌낼 용기가 있는가? 니체가 던지는 첫번째 질문

낙타가 대변하는 중력의 정신: 마땅히 해야만 한다는 중력의 정신(당위의정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당연히 이 도덕적 행위들을 해야 한다.

이 사회는 당위의 도덕없이는 유지되지 않아. 우리는 이미 관습과 규범안에 던져져 있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정신변화의 출발점은 순종과 복종하는 낙타의 태도!!

짐을 지는것은 부정적인것이 아니다.

짐을 한번이라도 지어봤어야(순종을 해 봤어야) 명령을 할 줄 안다.


사자의 단계: 자유를 원하면 명령하라.

타인과 소통하길 원한다면, 사랑하길 원한다면 명령할줄 알아야한다.

자유정신이 어떻게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명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하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의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제도와 관습들, 규범과 도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자유의지를 갖어야 한다. 사자처럼 표효할줄 알아야 한다. 안되요, 이건 내가 도저히 할 수 없어요! 정말 이 단계에 갈 때, 자유의지를 획득할때에 비로서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사자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자유정신은 기존의 가치, 관습, 규범, 관계들을 파괴할 수 있는 부정의 힘이다.

긍정하는 힘 역시, 부정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사자


자유정신

부정의 힘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

명령하는자.


그냥 기존에 명령되어있던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 틀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기업에서도 disruptive innovation(파괴적혁신, 관습을 탈피하라)를 강조한다. 부정의힘은 명령하는 자를 잉케한다. 무엇을 위한 부정이고 무엇을 위한 파괴인가. 새로운 가치를 위한 부정이고 새로운 가치를 위한 파괴인다. 청소년들이 기성세대에 저항을 할때에도 이 면이 부각이 되어야 자신의 부정행위와 저항행위가 사회로부터 비교적 손쉽게 용인이 될 수 있다. 내가 부정하려는것은 부정하려고 부정을 하는게 아니라 새로운 가치창조를 위해 기존 가치를 파괴하는 사자의 정신이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얻어내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노'라는 것은 신성하다. 의무에서 조차도.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자기자신을 변화시킨다.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존의 전통적 가치: 너희가 진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이렇게 살아가야해, 이렇게 행동해야되.You should

새로운 가치를 위한 자유는 'I will'<<기성세대가 듣기 싫어하는 말. 나는 이 길을 갈래.

내가 이 길을 갈래 하면, 기성세대는 말한다.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그 길로 갔다가는 제대로 살지 못한다.' 참 힘든것이다.

도덕적 명령을 거부하고 저항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을수 있다.

Will 의지를 갖으려면 먼저 '내'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있다는것을 확인하느냐. 다른사람과 나는 다른생각을 갖고 있다라는 인식을 통해서 나의 자기확인이 가능하다. 


나에게 무거운짐은 도대체 무엇인가? 낙타의 단계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것인가? 사자의 단계


이렇게 자기인식을 갖고 자유의지를 실현하려는 인간을 니체는 주권적개인이라고 표현한다. 자기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고 자기자신의 삶에 방향을 스스로 설정할수있는 개인을 주권자라고 한다. 주권적 개인이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실험적으로 살아갈 수 있고 위험하게 살 수 있다. 남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부모가 반대하는 이유는 이 길이 위험하고 험난하다는것을 알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삶은 변화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우리모두가 주권적 개인이 되고자 한다면 사자로서 거듭나야 한다.


넘쳐나는 힘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실험할줄 알고 모험할줄 알아라. 때로는 정도로부터 벗어날 줄 아는 일탈행위도 할줄 알아야 한다. 돌아올수 있는 복원력을 갖는 범위까지.


사자의 정신은 명령!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니 이런 가치를 주되고 핵심적인 가치로 삼아라, 이것이 바로 사자의 명령하는 정신이다.'


모든 명령에는 시도와 모험이 따른다.

자신의 율법에서도 판관과 동시에 제물이 되어야 한다.

너는 너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명령하려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이렇게 명령하는 자는, 낙타의 단계를 거쳐왔기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 삶에 무게를 만들어 중심을 잡는다. 그래서 사자의 단계에 오면 자기가 자기자신에게 명령을 하지만 자기자신에 명령을 들어야 하는 순종자이기도 해야 한다.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설정한 가치를 내가 따를때 주인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령자이면서 동시에 복종하는자이다. 자기자신을 순종하는자. 남의 말을 듣는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말이 조언이 될수는 있지만, 판단은 자기몫이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명령하는 자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극복할줄 알아야 한다. 이게 없이는 명령할줄 모른다. 그러므로 사회에서도 명령하는자는 상당히 힘든 과제와 역할을 담당한다.


어린아이의 단계: 삶을 놀이로 만들라

여러분 진정한 용기는 어디서 발현하는지 아시나요? 나에게 위협이 되고 무게가 되는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것이 용기를 가져온다. 이 용기를 가지고 우리는 사자의 단계로 진입을 한다. 나는 이것을 실현할꺼야. 나의 이성은 이것이야. 나는 나의 꿈을 반드시 이루고 말거야 라는 사자의 단계를 통해 자유의지를 표현했다. 맨 마지막 단계에 가서 니체는 역설적이게도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는 말을 한다.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의 삶이 고정되있는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는것을 인식할수있게 된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다는것을 알게된다. 이것을 니체는 생성의 무죄라고 말한다. 우리가 변한다는것은 죄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인식을 통해 변해간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정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기때문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놀게 된다. 낙타가되고 사자가 되면서부터 잘 안놀게 된다.

어린아이는 망각이라 30분전에 했던것을 잊고 엄마와 함께 또 새로운 놀이를 한다. 어린아이는 따라서 스스로의 게임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여기서 순수한 긍정을 의미한다.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놀줄 알아야한다. 유희로서 이 세계를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 낙타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관습과 제도를 파괴하고 혁신하는 사자일 필요도 없다. 이런 과정을 다 거쳐봐야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긍정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놀이의 규칙이 없다. 스스로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삶을 있는그대로 긍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따라가야 할 규칙들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린아이의 태도를 가질줄 알아야 한다. 우리 어린아이의 모습을 너무 빨리 상실한다. 어린아이는 망각의 힘, 새로운 시작, 놀이, 신성한 긍정을 의미한다. 잊어버릴줄 알아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기억만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망각할줄 알아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우리들의 삶을 놀이로 받아들인다. 'I am' as 'I am' '나'는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이다. 아빠를 왜 사랑해?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빠를 사랑하니깐. 이유와 계산이 없는 아이의 특성. 사람들은 헤어질때 상대방이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사람은 있는 그대로 인데.. 상대방에 대해서도 내 자신에 대해서도 '네 자신의 우상을 가지지 말라'-막스 프리쉬>>>내 있는 존재의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낙타>>you should 넌 이렇게 살아야해

사자>>I will 난 그렇게 안살래

아이>>I am 난 있는 그대로 나야.


이 단계로 살아가기 위해 프리드리히 니체는 변신을 해야 한다고 한다.

"힘이 축적된 자의 이상은 어린이의 놀이이다"-니체, 어린이는 유용한것 무용한것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놀이하는 아이는 니체에게 있어서 삶의 예술가로서 이상향이었다.

우리는 신이 없는 시대를 논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전통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의 무게를 가지고 이땅에 태어났다.

네가 여기 태어난것은 무죄이다.-니체 너의 생성과 변화는 무죄이다. 너가 어떤존재가 될지 그것도 무죄이다. >> 생성의 무죄는 우리삶을 놀이하는 어린아이로 만든다. 삶을 예술적으로 정당화 해라. 생성의 무죄에 의해 우리는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시간은 장기판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다. 왕국은 어린아이의 손 안에 있다."-헤라클레이토스, 삶의 무게를 너무 무겁다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갈수 있는 놀이판으로 만들어 보자. 그러면 우리의 삶은 가벼워진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중 최고의 예술작품은 나의 삶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니체의 최고 실존적인 목표: 어떤게 사람은 본래의 자신이 되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성찰하고 인식하고 노력한다. 본래의 자기자신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갖고자 한다면 낙타의단계 사자의단계 어린아이의단계, 3단계로 변신할줄 알아야 한다.

낙타는 도덕적명령을 한다. 무게를 견뎌낼줄 알려고 요구한다.(순종)

사자는 자기의 의지를 강조한다.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타파하기를 요구한다.(명령)

이 두단계를 거쳤을때 우리는 존재의 자연스러움(어린아이)에 도달할 수 있다.

순종만하면 자기 존재의 자연스러움에 도달하지 못한다.

명령만 할줄 안다면 자기 존재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갖추지 못한다.

이것이 니체의 자기 창조의 변신과정이다.

이 세가지 모습을 나의 내면에서 긍정할때, 비로서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첫걸음을 디딜수 있다.

이것이 니체의 허무주의가 일상화되고 평범화된 시대에 어떻게 하면 본래의 모습으로, 진정한 양식으로 살아갈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다.


Q.어린아이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한 망각이란?

망각이라는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것들을 물리적으로 잊어버려라. 그말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만 더 날수도 있다. 재미있는것은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하면, 과거에 얽매어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출발을 하기 힘들다.>>새로운 출발을 할 때 비로소 과거는 매듭지어진다. 니체는 상당히 모순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지만 이점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일관성을 어디서 찾을수 있냐, 어린아이의 단계도 권력의지의 단계이다. 어떻게 아느냐.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출발할수있는 삶에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둔다면, 과거는 어떻게 보면 퇴색될수도 있다. 어떻게 잊느냐. 너의 몸의 목소리를 들어라-니체, 우리는 우리 내면에는 사실 다양한 감정과 충동들이 숨어있다. 의식으로 각색하지 말아라. 끊임없이 삶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망각할수있는 테크닉을 기를수있다.


Q.니체의 삶과 사상에서 사랑은?

일단 니체는 기독교적인 덕성의 사랑은 부정하고 폄훼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최고의 권력을 갖고있는자는 사랑하는자라고 하였다. 사랑하는자이다라는것은 무엇이냐면, 외부에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도 독자적인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고, 나도 독자적인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사람의 표현방식이 다양할것인데, 그것을 극복하고 능가할수있는 상회가치를 너가 스스로 만들어라. 그럴때 너가 그사람을(상대방의 권력의지까지) 포용하고 수용할수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방식의 사랑이다. 싸우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 사랑의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어느 선을 넘으면 침해를 받고 모욕감을 받고, 관계를 돌이킬수 없는 방식의 싸움도 있다.  그런의미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고,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자기 감정이 있는데 그것이 늘 똑같이 갈수는 없다. 둘이서 이것을 해결할 방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서로가 공존할수 있는 방식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그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이다.


7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던 핵심사상은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하면 비로소 춤을 출 줄 안다.-차라투라투스


춤을 출줄 아는 사람은 운명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는다.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줄곧 달렸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가볍다.

나는 날고 있으며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야 어떤 신이

내 몸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거부하고 부정하였던, 기독교적인 신은 춤을 출 줄 모르는 신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신의 신으로 제시한 차라투라투스(디오니소스)는 춤을 출 줄 아는 신이었다.

춤을 춰본사람들은 안다. 몸이 가벼워야 한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는 춤을 출 수 없다. 심각한 생각을 하면서 춤을 추는 사람은 없다. 춤을 출때에는 춤에 몰두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에 대해서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에 대해서 아주 예리한 비판과 인식을 하였던자가 차라투스트라이다. 네가 너의 삶을 살고자 원하느냐. 그런데 삶은 영원히 반복될것이다.<< 참 무거운 인식이다. 이렇게 무거운(깊은) 인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에 절망하지 않고, 삶의 영원회귀에 대한 반박조차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영원히 긍정할수 있는것일까?

진중한 삶의 철학을 지녔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 춤추는 자가 될 수 있었는가? 

이것이 니체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에 '너희들 다시한번 생각해봐라'하고 던지는 질문이다. 춤추는 신, 삶의 무상함을 인정하라. 춤추는 신은 중력의 힘을 거역할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 있다.

춤은 중력과 저항하는 운동의 예술, 몸의 예술이다.


이사도라 던컨: 니체의 영향을 받은 미국 출신의 무용가,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력을 강조한 현대 무용의 개척자.

비극의 탄생은 '내 성경'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춤을 추고 있는

남자에 관한 구절들로 채워져'있다.-이사도라 던컨, 춤의 예술


춤: 몸의예술, 몸을쓴다. 몸을 쓴다는것은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몸의 목소리를 들을줄 알아야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동의 예술이다.


몸의 예술

운동의 예술

복종하는 정신

중력의 극복(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니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것은 "너의 삶을 가볍게 만들어라"이다.


춤을 추듯이 살아라.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한다.

중력의 정신(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그렇게 중요한 가치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없다. 이것은 세상의 삶을 가볍게 받아들이라는것은 아니다. 삶을 진지하게 대하더라도 무겁게 대하지는 말아라. 가볍길 바라고 새가 되길 바라는자는 자기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니체의 가르침이다.

어떤사람이 가볍게 살아가는것일까.

자기의 약점까지도 사랑하고, 자기의 모든것을 인정할줄 안다.

한쪽은 자기의 모든 약점이 컴플렉스.

매일매일 불평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느쪽이 가볍게 살아가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키는 어느정도 되야해.>> 그러면 그것이 외부에서 강요된 가치가 될 수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작은거야. 아버지 어머니는 무엇을 하신것일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것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여보자. 그래 너는 키가 클지 모르겠지만, 내 정신의 키는 너보다 더 커. 나 키 작잖아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 자기 자신의 특징을 가져다가 작게 만들어서 위트로 만들줄 아는 능력을 아이러니라고 한다. 자기자신의 약점에 거리두기를 해서 유머로 포장할줄 알아야 한다. 가벼워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거리두기로 삶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다. 


네 운명을 사랑하고자 원하는가? 춤을출줄 알아야 한다.

춤을 추고자 원하는가? 중력을 극복해라.(날끌어당기는 무거운 짐이 무엇이야!) 그럴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줄 알아야 한다.

춤을 추는자는 자기자신을 사랑할줄 아는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현대 무용에 끼친 영향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니체의 사상과 무용(dancing)에는 상당히 많은 유사점이 있다.

1. 몸을 인정한다.

2. 몸속의 자연을 수용한다.

3.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된다.

4. 영혼을 가꾼다.

5. 삶을 사랑한다.

자아를 찾는것을 너무 의식적으로 행하지 말고, 몸으로부터 시작해라. 거울을 보며 진지하게, 쓸만해. 멋있어. 몸을 인정한다는것은 내 외면적인부분을 인정한다는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작용들 충동들 움직임들을 인정한다는것이다. 몸도  제각각이듯이 몸속에서 일어나는 활동들도 다 다르다. 그것은 몸속의 자연을 인정할줄 아는것이다. 몸을 인정하게 되면 본래의 자기자신이 된다. 이게 독특한 니체만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의식적으로 자아를 찾고자 할때는 오히려 자아는 찾기 힘들어지고,  그것보다는 의식을 떠나서 자기몸을 인정하게 될때 오히려 자기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내 몸에 맞는 나의 삶의 방식을 찾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다. 영혼이 몸과 떨어져 있는것이 아니다. 

몸이 죽으면 너의 영혼도 죽는다- 니체 

이렇게 영혼이 생기게 되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명한 무용수들은 대부분 이 과정을 거친다. 자기몸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몸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보면 결과적으로 항상 자기몸과 교감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되고, 나는 어떤 욕구체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나는 어떤 욕구체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고, 그 욕망을 다스리고 질서를 지울 수 있을때 나만의 성걱을 갖을 수 있다. 전통 형이상학이 몸보다 정신을 강조했다면, 니체는 몸을 정신보다 강조하면서 '몸은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이성이다'-니체

그래서 몸을 인정하고 내몸속에 자연을 수용하고, 그러다보면 너도모르게 자아가 형성되고, 자아가 형성된 순간 너가 그렇게 찾아 헤메던 영혼도 얻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너는 너의 삶을 긍정하게 될것이다. 자아를 찾는자들이여, 입으로 자아를 찾지 말아라. 자아는 말하는것이 아니라 행하는것이다.


나의 덕은 춤추는 자의 덕이다.

그리고 무거운 것이 가볍게 되고,

모든 몸이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게 있어서 알파이자 오메가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댄서가 되라! 너의 삶을 가볍게 받아들여라. 이것이 쉽지는 않다. 삶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사랑할줄 알아야 한다. 너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 너의 몸의 내면을 들여다보아라.


그러면 우리의 예술로서의 삶, 너의 삶을 정당화하는 방법은?

여기에 비로소 예술이 등장. 너가 머리로 깨우치는 지식은 너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학문보다 한단계 위에 있는것이 예술이다. 허무적인시대에, 최종적인 목적도 없고 가치도 없는 시대에, 너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이 세상에 우리의 삶이 행복하게 되려면, 너의 삶 자체를 예술 자체로 만들어라. 진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의미있는 진리를 탐구하라. 신이 죽은시대에도 불구하고(우리에게 강요되던 최고의 목적, 최고의 이상이 붕괴되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처럼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너만의 새로운 신을 창조하라. Dancing star, Dancing God. 네가 정말 동경하고, 네가 온 삶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너만의 신을 가져라. 삶이 유한하고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너의 짦막한 삶에 그래도 의미가 있는 영혼을 추구해라. 이것은 비극적 인식이다(비극=불구하고).  그것이 니체의 이 삶을 가볍게 사는 방식이라고 이야기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에게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구현한 고대 그리스의 신이 있었다. 디오니소스.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두 종류의 신이 있다. 아폴론, 디오니소스가 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인것은 예술의 충동을 대변하는 두가지 원칙일뿐만 아니라, 삶을 이끌어가는 두가지 종류의 삶의 방식이다. 아폴론은 빛의 신이다. 빛이 있으면 사물을 똑바른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규정하고 정의를 내릴수 있다. 아폴론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끊임없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환상을 만들어낸다. 허구,환상=비전, 보이지가 않으면 길을 걸어갈 수 없다. 뭔가가 보여야 한다.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만든 나의 삶의 목표는 나의 삶이 유지되는 짦은 시간에만 작용하고 의미가 있는것이기 때문에, 한낱 허구와 환상에 불구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의미있는 환상이다. 이것이 아폴론의 방식. 그런데 기존의 비전에 너무 묶여있으면 새로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도취와 망각이 필요하다. 술을 마셔야 한다. 아폴론적인것이 너무 강할때 우리는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서 유대감이 안느껴진다. 충돌이 일어나고 소통이 필요한다. 술을마셔야 한다. 너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너도 하나의 생명체이고, 나도 하나의 생명체라는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축제이고 디오니소스이다. 디오니소스 신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이 삶이 수많은 고통과 수많은 불행이 점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살만하다고 느끼게 해주는것이 디오니소스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왜 아폴론이 필요하고, 디오니 소스가 필요하냐?'


개개인이 자신을 구원할

환영(비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통의 세계 전체가 필요하다.-비극의 탄생


삶은 예술을 통해 구원된다.-비극의 탄생


세계는 오직 미적으로만 정당화된다.-유고


예술이 없으면 우리는 삶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계속 골머리를 앓으면서, 어떻게 살아야하지, 이게 정말 삶일까, 나의 진정한 모습은 어디에 있지... 우리는 이렇게 삶을 살 수 없다. 삶을 이끌어갈수있는 가치를 만들어내는것만큼 예술가적인것이 어디에 있느냐. 

삶은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비극의탄생


이 예술은 삶의 예술이다. 실존의 예술이다. 그렇기때문에 프리드리히 니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세계는 오직 미적으로만 정당화된다.-유고


아무리 과학인식을 통해서도 우리세계는 설명이 안된다. 왜 고통이 많은지, 불의가 많은지, 갈등이 많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한다. 살아갈수밖에 없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가볍게 만들수있는 예술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예술이 있다. 그래서 우리 세상에 대한 진리와 인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몰락하지 않는다. 예술이 있기때문에. 삶의 예쑬가가 되어 고통을 극복하고 가벼워져라.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프리드리히 니체의 반전이다. 기독교전통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에는 아모르데이(신의 삶을 사랑하라)라고 하였다. 너의 삶을 살지말고, 신의 삶을 살아라. 너의 의지대로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라고 하였다. 그것이 우리를 짓눌렀다. 각 개인은 자아도 정체성도 없다. 그것이 20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 허구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깨닫게 됨으로서, 신이라는것도 인간의 삶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임을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운명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라고 하였을때 우리는 조심할것이있다. 운명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운명론에 빠지면 안된다.

   

운명론:모든것이 운명을 통해 변할수 없이 정해져있다.

아모르파티: 삶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사상.


니체는 운명론에 반대함.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은 '네가 네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라는것을 의미한다. 삶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실존과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라는것이 니체의 아모르파티의 사상이다.

내가 노력했지만 노력한만큼 결과가 안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의 실존에 중심을 잡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아모르파티.


운명론과 아모르파티를 대변하는 신화적 인물이 있다.


운명론적 인물 : 오이디푸스


운명적 행위의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비극의 탄생


너의 삶은 결정된것인가? 너의 삶이 결정된것이 아니라, 너의 삶은 너의 의지에 따라 변화될 수 있음이 결정된 것이다. << 굳이 운명론을 받아들이자면 니체는 이렇게 말함


아모르파티적 인물 : 프로메테우스를 따라라. 

끊임없는 고통의 바퀴를 도는 삶을 살아간 신. 끊임없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아남기위해서는 제우스를 속일줄 아는 예술가적 계략을 쓰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실존의 방식의 삶을 살았던 인물.


영원한 고통의 대가로 획득한

자신의 지혜를 통해

올림포스 신들의 멸망-비극의 탄생


오이디푸스(수동성)>>프로메테우스(능동성)


너의 운명을 주어진대로 받아들여라x>>너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너의 운명을 수용하여라.

고통을 너무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삶은 고통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고통이 안격을줄 알았는데, 사랑하는것 자체가 고통이다. 인간의 실존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이 프로메테우스에서처럼 결과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 네가 네 삶을 구원하고자 원하느냐, 그러면 너가 현재 느끼고 있는 고통을 긍정할줄 알아야 한다. 

외상(트라우마)를 격었을때 사람들은 의식에서 지우려고 한다. 이런 트라우마가 걸렸을때 이것을 치유하는 방법중 하나는 그 환자로 하여금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줄 알도록 만드는 길을 걷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긍정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을 필연적으로 수반할수밖에 없는 고통을 긍정하라.


'긍정'으로 향하는 나의 새로운 길,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측면의 자발적 탐구.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

세계의 절대적 회귀와 영원의 소망-유고


실존의 끔찍하고도 의문스러운 측면을 끊임없이 탐구하라. 실존이 좋은점만, 행복한점만, 긍정적인점만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다. 이 실존을 있는그대로 긍정하는 태도는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끊임없이 영원히 회귀한다고 할지라도, 그 영원히 반복되는 과정속에서 자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영원성을 추구할줄아는 태도를 가르쳐라. 


충만과 과잉에서 탄생한 최고의 긍정

고통과 죄 자체에 대한 긍정

의문스럽고 낯선 것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세계의 절대적 회귀와 영원의 소망


사람은 존재하는것 자체만으로 다른사람에게 해이건, 이익이건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고통 그 자체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의문스럽고 알수없고 낯설고 이질적인것에대한 긍정. 이런것들을 갖출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잇다. 니체-존재하는것에는 빼버릴것들이 하나도 없다. 없어져야 할것들은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것은 아무것도 없다.-이사람을보라


아모르 파티- saying yes to your life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즐거운학문


우리에게 억압했고, 중압감을 부여했던 늙은 신은 죽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곳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신이 죽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무런 가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그러한 사회적 현상들이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최고의 가치가 없어졌다는것은, 내가 스스로 나의 삶에 주인이 되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것이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우리의 배가 다시

모든 위험을 향해 출항할 수 있게 되었다.-니체


바다를 나가지 않고서는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볼 수 없다.


인식의 모든 모험이 다시 허락되었다.(어떤것도 진리가 아니다. 모든것이 허용된다.)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니체


그렇기때문에 니체가 너의삶을 있는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면, 너의 삶은 오늘 이 순간부터 새로운 가능성으로, 새로운 바다로 열릴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것-이 사람을 보라


그것이 바로 허무주의 시대에(신이죽은시대에) 우리가 이 삶을 견뎌내고 살아갈수 있는 방법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가장 위험한 철학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자. 가장 선정적이고 극단적인 명제를 선포한자.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한 자.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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